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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고인과 필자. 표문송 관장 제공
어디선가 들어본 유행가 가사 같다. ‘불꽃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가다.’ 누가 강헌 아니랄까 봐 그렇게 살다 갔다. 그가 유행가에서 시대를 읽었듯, 나는 이 통속적인 문장에서 그의 생애를 읽는다.
불은 어둠을 밝히지만 질서를 파괴하기도 한다. 강헌은 그 모순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한 세계의 문법을 익히면 그 권위를 의심하고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이 월경자에게 안온한 영토란 없었다. 이호철북콘서트홀 ‘문예북흥’ 장서표 전시에서 판화가 남궁산에게 이름 두자와 빨간 불길만 새겨 달라던 사람. 불꽃 남자 강헌이었다.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에서 문학과 음악이론을 공부한 그는 영화와 비평으로 세계를 넓혔다. 첫 불은 영화판에서 붙었다. 1980년대 말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에서 광주의 비극을 다룬 ‘오! 꿈의 나라’와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파업전야’를 만들었다. 공권력에 맞서던 시절 카메라는 시대의 급소를 겨누는 횃불이었다. 음반 사전심의와 영화 검열에 맞서 싸우며 영화 사전심의 위헌 결정에도 힘을 보탰다. 국가에 예술을 검열할 권한이 있는가. 헌법으로 따져 물었다. 오늘날 케이(K)컬처의 불길도 그가 함께 지킨 표현의 자유 없이는 번지지 못했을 것이다.
80년대 말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서 활동
1991년 김현식에 관한 평론으로 대중음악 비평의 지평을 열었다. 그에게 김현식의 목소리는 80년대의 균열을 증언하는 역사적인 음향이었다. 서태지와 신해철, 김민기와 정태춘에게서도 시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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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설명하기보다 음악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대중가요사에 비평의 불씨를 가져온, 그는 프로메테우스였다.
문화계간지 ‘리뷰’ 등을 만들고 검열철폐 기념 콘서트 ‘자유’와 포크음악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노동의 새벽’ 헌정 음반과 노무현 추모 음반 ‘탈상’을 제작하고 20여년간 대중음악사를 가르쳤다. 불씨는 다음 세대로 옮겨붙었다. 벼락같이 나온 첫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노래로 역사를 읽더니, 마지막 장편소설 ‘생의 찬미’로 문학청년의 자리로 돌아왔다.
마흔둘에는 불꽃이 꺼질 뻔했다. 대동맥이 찢어지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는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그 정체를 파헤치겠다며 명리학에 뛰어들었다. 발견한 것은 숙명의 굴레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었다. 세상의 불합리와 싸우던 횃불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제도 안에서도 불을 지피려 했다. 평생 프리랜서로 살던 그가 문화재단 대표이사 제안을 받은 다음 날 나를 집으로 불러 떡만둣국을 끓여주었다. “내가 하면 잘할 거 같지 않냐?” 그 순진한 자신감 때문인지, 떡만둣국 때문인지, 나도 함께 개혁의 불을 지폈으나 실패했다. 기득권은 개혁을 거부했고 관행을 태우려던 불은 도리어 우리를 태웠다. 모든 불꽃이 승리의 봉화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90년대부터 대중음악사에 비평 불씨
불의의 사고로 전처를 잃고 자신도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상에 누운 그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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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도 이튿날도 그의 말은 “죽고 싶다”였다. 사흘째, 어조가 달라졌다. “여전히 괴롭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더 괴롭다.” 아, 강헌 살아났구나. 이것은 한 개인의 얄궂은 희비극이 아니라, 생과 사의 틈바구니에서 기어코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서글프고도 숭고한 생의 조건이었다. 숱한 병마와 참혹한 사고 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간 것은, 그 지독한 허기마저 껴안으려 했던 강헌의 뜨거운 의지였다. 그토록 생을 갈망하던 사람의 죽음이라 더욱 허망하다.
허기가 자신을 살렸기에 타인의 비극 앞에서도 밥을 권했다. 내가 큰 사고를 당한 날 ‘가보정’으로 부르더니 사정도 묻지 않고 “일단 먹자”며 갈비를 산처럼 시켰다. 5단으로 질주하던 나를 1단으로 낮추고 일단 먹여 진정시켰다. 먹고 나니 세상이 다시 만만해졌다. 그게 강헌이었다. 와인 한잔에 역사와 철학이 따라붙고 음식 한접시에 문명사가 펼쳐지던 대식가이자 이야기꾼.
고인의 장례식에서 필자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표문송 관장 제공
10월20일, 향년 64. 지병이던 대동맥박리 재발로 인한 심정지로 그가 떠났다. 그가 피워놓은 화톳불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웃고 떠들고 노래했다. 에스엔에스(SNS)의 애도 글은 디지털 시대의 만장처럼 나부꼈다. 조문 차트가 있다면 빌보드 1위는 그의 몫이었으리라. ‘강헌 현상’이라 부를 만한 진풍경이었다.
살풍경도 있었다. 왔음직한 고관대작들은 보이지 않았고 정작 왔어야 할 가요계의 발길도 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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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싸웠던 권력과 사랑했던 음악의 세계가 보여준 기묘한 부재였다. 권력의 인정에 목매지 않고 음악산업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 그의 장례식은 참석한 사람뿐 아니라 오지 않은 사람으로도 그를 증언했다.
장례식장의 마지막 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은 냇 킹 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ás, Quizás, Quizás). 언제, 어떻게, 어디서 만나느냐는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받지 않는 전화였지만 끊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짚어주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대답이 ‘아마도’라니. 운명을 읽되 굴복하지 않았던 그에게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낭만적 긍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다음을 기약한 약속들은 한꺼번에 미완의 문장이 되었다. 만약 한번 더 전화했더라면. 만약 하루만 더 있었더라면. ‘아마도’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열어놓은 문이라면, ‘만약’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 앞에서 두드리는 닫힌 문이다. 우리는 ‘아마도’라는 희망으로 사랑을 시작하고 ‘만약’이라는 그리움으로 사랑을 이어간다.
장지에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그의 두 아이와 함께 ‘가보정’에 갔다. 그가 그랬듯 일단 먹고, 다시 시작했다. 떠난 그가 남은 사람들에게 전해준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형, 걱정 마시라.
불꽃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갔다. 그러나 바람은 불씨를 더 먼 곳으로 실어 나르기도 한다. 우리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제, 어떻게, 어디서.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덧없으나, 더없이 행복했다. 강헌 형, 잘 가시라.
표문송/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호철북콘서트홀 관장
국가에 예술을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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